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화도 회군 (문단 편집) == 개경 공방전 == >태조가 숭인문(崇仁門) 밖 산대암(山臺巖)에 진지를 구축한 다음, 지문하성사(知門下省事) 유만수(柳曼殊)를 숭인문으로 들여보내고, 좌군을 선의문(宣義門)으로 들여보냈으나 최영이 맞서 싸워 모두 물리쳤다. >{{{#!wiki style="text-align:right" 《[[고려사]]》 우왕 14년 6월 27일 [[http://db.history.go.kr/KOREA/document.do?recordId=kr_137_0010_0060_0070|#]]}}}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pbs.twimg.com/Bdd1NEBCEAArxA2.jpg|width=100%]]}}} || || {{{#000000 ▲고려군의 갑옷이었던 경번갑 }}} || 원정군은 우군과 좌군으로 나뉘어 우군은 개경 동쪽의 숭인문 밖, 좌군은 개경 서쪽의 선의문 밖에 주둔했다. 좌•우군은 이 [[나성#s-2|나성]](羅城)을 돌파하는데 애를 먹었는데, 최영은 열세의 전력에도 불구하고, 좌•우군의 첫 번째 공세를 막아냈다. 당시 원정군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회군했기 때문에, 공성전에 필요한 장비를 전혀 챙겨오지 못했을 것이다. 《고려사》 <지리지>의 -왕경(王京) 개성부(開城府)-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성의 높이는 27척, 두께는 12척이라고 했는데 이는 높이 8.1미터, 두께 3.6미터에 해당한다. 별다른 장비없이 함락시키기는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. 이때 우군에 속한 유만수(柳曼殊)의 패배에 대해 이성계가 유만수가 나가기 전부터 >'''"저 놈 눈은 큰데 광채가 없고 담력도 없으니 패배할 것이 뻔하겠다."'''(曼殊目大無光, 膽小人也. 往必北走) 라고 말했다는데, 이성계같은 명장이 쿠데타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질 것이 뻔한 장수를 일부러 내보냈다는 것은 이해가 잘 안되는 일이므로 이는 패배라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오히려 이성계의 통찰력을 드러내고자 하는 후대의 영웅적 보정일 가능성이 높다. 게다가 유만수는 1차 왕자의 난 당시 친이방석계로 분류되어 살해당했기 때문에 깎아내릴 동인도 있고. 유만수의 패배 이후 이성계는 아예 말의 안장까지 풀고 쉬면서 싸울 생각이 없다는 듯 느긋하게 쉬고 있었는데, 이후 기록을 보면 난데없이 개경 동쪽 숭인문 안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, 적은 아무도 막지 못했다고 한다. 이때 이성계는 좌군과 협공했다고 되어있고 이후 좌군을 이끄는 조민수가 좀 더 안쪽으로 전진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개경 서쪽의 선의문을 맡았던 좌군은 성 내 진입에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. 이성계가 유만수의 패배 이후 조바심을 내며 더 달려드는 대신 오히려 공격의 고삐를 늦춤으로써 숭인문의 병력이 더 급한 선의문 방면으로 빠지게 되었고, 이를 노린 이성계가 방어가 허약해진 숭인문을 더 쉽게 공략할 수 있었을 것이다. 한편, 좌군을 이끌고 선의문을 돌파했던 조민수는 영의서교(永義署橋)까지 나아갔으나, 여기서부터 최영에게 다시 밀리게 되었다. 영의서교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조민수가 서쪽 선의문을 통해 진입했던 점으로 볼때 선의문과 남산 사이에 있었던 교각으로 보인다. 당시 개경의 수비군은 모을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징발하여 개경으로 집결시키는 한편, 수레를 긁어모아 거리 입구를 봉쇄하는 [[바리케이드]]를 만든 참이었다. 따라서 조민수의 병력으로도 최영의 부대를 쉽게 깨뜨리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. 당시 조민수는 검은 색의 큰 깃발, '흑대기'(黑大旗)를 들고 있었다. 최영의 군대는 흑대기를 든 조민수의 부대를 쫓아내는 분전을 했는데 바로 그 순간, '''이성계의 군대가 나타났다.''' 이성계의 군대는 쫓겨가는 조민수의 흑대기 대신에 '''황룡대기(黃龍大旗)를 세우고, 북을 치며 위풍당당하게 나타나니''' 그 위엄이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.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oi67.tinypic.com/2jepxlx.jpg|width=100%]]}}} || || {{{#000000 '''개경 전투 요도 ─ <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개경 전투>, 이상훈''' }}} || 당시 [[남산]]은 최영의 휘하인 [[안소]](安沼)가 정예병을 거느리고 지키고 있었으나, 이 어마어마한 광경을 보자 두려워한 나머지 속절없이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. 이성계는 이로 인하여 [[남산]]을 점령했는데, 개경 도성 내의 공간은 서북쪽에 궁궐과 관아가 배치되어 남산을 중심으로 동•서 경계선이 이루어졌기에 남산은 핵심적인 요충지였다. 이 남산이 원정군에 점령되면서 사실상 개경 전투도 승패가 결정되었다. 최영은 패배를 직감하고 물러났는데, 이 시점에서는 최영에게 당하던 조민수의 부대도 물러나는 최영의 부대에게 역공을 취했을 것이다. 최영은 궁궐의 화원(花園)에서 자신의 딸 그리고 사위인 우왕과 함께 있었고, 이성계의 군대는 화원을 '''수백 겹으로 포위했다.''' 이어 이성계는 암방사(巖房寺)로 올라가 병사들에게 '대라'(大螺)[* 소라 껍데기로 만든 연주용 또는 군사용 악기의 한 종류]를 불게 했다. 수백 겹으로 포위한 병사들이 대라를 불며 최영이 나오라고 소리를 지르는데, 이성계의 군대만이 대라를 불었기에 대라 소리만 듣고도 개경 사람들은 이성계의 군대가 온 줄을 알았다고 한다. 마침내 담장이 무너지자, 최영은 자신의 손을 잡고 우는 우왕에게 두 차례 절을 하고 곽충보(郭忠輔)를 따라 밖으로 나가 이성계를 보았다. 이성계는 최영을 보자 눈물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. >"이 일은 내 본의가 아닙니다. 국가가 편안하지 않고 백성이 피곤하여 원망이 하늘에 사무쳐 부득이하게 일어난 일입니다. 부디 잘 가십시오, 잘 가십시오." >{{{#!wiki style="text-align:right" 《[[고려사]]》 우왕 14년 6월 27일 [[http://db.history.go.kr/KOREA/document.do?recordId=kr_137_0010_0060_0100|#]] }}} 숨은 뜻을 해석하면, '최영 당신에 대한 직접적인 원한이나 분노는 없으나, 내 야심과 목표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'에 가깝다. 최영은 탄식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. >"이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았구나!(仁任之言, 誠是矣)"[* 이인임은 최영에게 "이성계는 나라의 주인이 되려는 자입니다."라고 경고를 거듭했지만 최영은 이를 이간계로 받아들여 무시했다고 한다.] 이후 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대궐을 완전히 장악했다. 그때 [[이색(고려)|이색]]은 이성계를 만났고,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으나 이색과 대화를 나눈 이성계는 군사를 전문(殿門) 밖으로 물러나게 했다. 이렇게 하여 마침내 개경 전투가 마무리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